조상들이 즐겼던 우리의 술

잘익은 과실이 땅에 떨어져 자연 발효되어 알콜성분을 지닌 술이 된다는 사실로 미루어 술의 기원은 아득히 먼 옛날부터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문헌에 의하면 삼국시대 이전 마한 시대부터 한해의 풍성한 수확과 복을 기원하면 맑은 곡주를 빚어 조상께 먼저 바치고 춤과 노래와 술마시기를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농사를 시작하였을 때부터 술을 빚어 마셨으며 모든 행사에서 술이 애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술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탁주, 약주, 소주 등 세종류의 술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왔고 그 제조방법으로 보아 탁주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탁주에서 재를 제거하여 청주(후에 약주라 칭함)가 되었고, 또 이를 증류하여 소주가 만들어졌다고 해석된다.
탁주는 일명 '막걸리'라 불려지며 이는 막 걸렀다고 하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약주는 탁주가 먼저 제조되면서 숙성이 거의 끝날쯤이면 술독 위에 맑게 뜨는 액체속에 '용수(싸리 나무로 만든것)'를 박아 맑은 액체만 떠내는 것이 약주(청주)의 상례이다.
약주란 말은 본래 중국에서 약으로 쓰이는 술이란 뜻이나 우리나라의 약주는 약용주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약주라 불리우게 된 것은 약300여 년 전부터인데 이조시대학자 서유거란 사람이 좋은 술을 양조하였는데 그의 아호를 약봉이라 했으며, 그가 약현(현중구 중림동)에 살면서 제조하였다 하여 약주라 부르게 된것으로 전하여 지고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맑은 술 청주는 빚어졌다.

위지(魏志)고구려 전에 의하면 선장양(善藏釀)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술을 비롯한 발효제품이 잘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당나라 풍류객들 간에도 신라주가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 발효의 바탕은 누룩이었고 누룩으로 술을 빚는 방법은 일본에 전해져서 일본술의 발달을 크게 진보시키기도 하였다.

백제시대 사람 인번(仁蕃)이 일본을 가르쳐…

중국의 유명한 시인 이상은(李商隱)같은 사람도 신라주를 찬양하는 시를 읊었다고 하니 이미 삼국시대에 곡식을 가지고 만든 곡주에도 막걸리가 아닌 청주가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의 고사기(古史記)에 보면 응신천황(應神天皇, AD27~312)때 백제의 인번이란 사람이 새로운 방법으로 미주(美酒)를 빚었기 때문에 그를 주신(酒神)으로 모셨다고 한다.

일본인이 자랑 하는 청주 그 뿌리는 한국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증보리(贈保利)형제가 새술의 창시자로 그들은 기록하고 있는데, 이 새로운 방법이 곧 누룩을 이용한 양조법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인들이 자랑하며 자기들의 술이라는 청주가 실은 그 뿌리를 찾아보면 우리나라의 청주인 것이다.

고려시대의 술

고려시대에는 송, 원대의 양조법이 도입되었으며, 전래의 주류 양조법이 발전되어 국(누룩)의 종류도 소맥국(小麥麴)과 미국(米麴)으로 이루어질 분 아니라 주품(酒品)도 다양해졌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문종(1046년)때 왕이 마시는 술은 양온서(釀醞署)를 두어 빚어졌는데 청주와 법주 두종류로 구분되어 질항아리에 넣고 명주로 봉하여 저장해 둔다 하였다.
청주(淸酒)는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맑은 술로서 탁주(濁酒)인 흐린 술과 크게 대별된다. 동국이상국집의 시 속에 『발효된 술덧을 압착하여 맑은 청주를 얻는데 겨우 4~5병을 얻을 뿐이다』 라 하였고 고려도경에서는 『왕이 마시는 술은 양온서(釀醞署)에서 다스리는데, 청주(淸酒)와 법주(法酒)의 두 가지가 있어서 질항아리에 넣어 명주로 봉해서 저장해 둔다』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발효된 술덧을 압착하거나 걸러내여 맑은 술을 빚었고 이미 덧술법도 사용하여 알코올 농도가 제법 높은 청주를 빚었을 것이다. 즉 발효가 끝난 술덧을 잘 걸러 내어서 부드럽게 마실 수 있고 맑게 한 술이 청주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술

조선시대의 대표주 : 우리나라 주조사상 주목할 일은 조선시대에 오면서 지금까지 유명주로 손꼽히는 술들이 이 시기에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술은 고급화 추세를 보여 제조 원료도 맵쌀 위주에서 찹쌀로 바뀌고 발효 기술도 단(單)담금에서 중양법(重醸法)으로 바뀌면서 양보다 질 좋은 술들이 제조 되었는데, 이때 양주(良酒)로 손꼽히던 주품들은 삼해주, 이화주,부의주, 하향주, 춘주, 국화주 등이었다.
특히 증류주는 국제화 단계로 발달하여 대마도를 통하여 일본, 중국 등에 수출이 빈번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자가제조가 허용되어 자유로이 발전되었으나 중국에서는 국가가 제조를 관장함에 따라 우리술의 수출이 용이하여 더욱 발전되었던 것 같다.
조선후기에는 지방주가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지방마다 비전(秘傳)되는 술들이 맛과 멋을 내면서 노출되기 시작했다.
이때의 명주로는 서울의 약사춘, 여산의 호산춘, 충청의 노산춘, 평안의 벽향주, 김천의 청명주 등이 유명한 술들이다.
조선시대에 유입된 외래주 : 조선시대에는 다채로운 술들이 개발되었고 적지 않은 외래주가 공존하였다. 이 시대에 유입된 외래주로는 천축주(天竺酒), 미인주(美人酒), 황주(황주), 섬라주(暹羅酒), 녹두주(綠豆酒), 무술주(戊戌酒), 계명주(鷄鳴酒), 정향주(程香酒) 등이다.

조선말기의 술 : 19세기 조선말에는 국제화시대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외국과의 정보교환이 쉬워지면서 양주문화가 도입되었으며, 주세법이 생기기 이전에 자가제조 및 판매가 자유로웠던 관계로 술도 다양화 되고 주세법 창설 당시 제조장수는 무려 155,632개소나 되었다.
1907년 7월에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주세법이 공포되었고 같은해 8월에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전래주는 잠적하기 시작했으나 그래도 밀주가 성행하게 되자 1916년 1월에 주류단속이 강화되는 가운데 모든 주류를 탁주, 약주, 소주로 획일화시켰다.
1917년 부터는 주류제조업의 정비가 시작되면서 자가양조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었고 1920년을 기점으로 신기술이 도입되어 재래식 누룩을 사용하던 방법에서 흑국, 황국의 배양균을 사용하는 입국법이 활동됨가 동시에 전통주는 대부분 맥을 끊기게 되었다.

향후 발전 방향

우리나라에서 가장 전통적인 대중주라 할 수 있는 탁,약주가 보편화되지 못하고 한계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탁,약주제조업자의 영세성으로 시설투자 및 주질개선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으로, 제조장의 대형화로 주질개선을 하여야 하고 수입주류에 대한 경쟁력을 제고하여야 한다.

장기간 탁주면허 동결로 인한 기존 도매업체들의 독점폐단을 해소하고 사양되고 있는 탁,약주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하여 1997. 12. 20. 도매면허를 개방하고 99.1.부터는 특정주류도매면허로 통합하였는바, 이는 행정규제를 철폐하고자 하는 정부시책에도 부합되는 것으로서 탁주제조자들은 도매면허 개방취지에 따라 유통구조를 개선하여 타 주류와의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